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즐겨보곤 한다. 고레에다가 글도 잘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책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을 읽으면서다. 그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미디어에 대한 시각이었다.
이를테면, 1995년 옴진리교의 독가스살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디스턴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범죄란 범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고름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이는 분명히 우리와 관계가 있다는 시점으로 범죄를 보도하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127쪽) 범죄자를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악마화하는 방식의 보도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문제 제기다. “보도의 목적은 범죄나 범죄자를 우리 사회의 ‘음의 공유재’로 삼아 그로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태도가 특히 텔레비전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127~128쪽)
그의 책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가 2021년 국내에 출간되자 마자 구입했다. 시각은 한결 더 날카로워져 있다. 책 첫 머리에서 고레에다는 <어느 가족>으로 칸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뒤 자신이 했던 인터뷰가 어떻게 보도됐는지 이야기한다. 자신이 한국 언론(!)에 보도된 내용을 확인해보니 뉘앙스가 변한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결코 하지 않는 표현들까지 나왔다는 것이다. 어찌된 영문일까.
“왜 사회에 이런 보이지 않는 가족이 생겨난다고 보는가?” 고레에다는 이런 질문에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고발하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전제로 ‘공동체의 붕괴’를 말했다고 한다. “이 영화에서 묘사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은 ‘지역’ ‘기업’ ‘가족’에서 떨어져 나왔거나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된 사람들이다.”(18쪽) 그는 이러한 영화의 배경을 설명한 뒤 이렇게 덧붙였다. “공동체 이야기에 이어 EU 이야기가 나왔고, 그 흐름으로 독일이 EU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해내려는 역할을 일본이 ‘동아시아 공동체’ 속에서 맡고자 한다면 역시 과거의 역사를 제대로 마주하고 ‘청산’해야 하지 않을까…”(18~19쪽)
그런데 자신의 설명이 짧게 요약되고 뒷부분이 부각되면서 “‘아베 정권이 계속되어 우리는 불행해졌다’는 몹시 단순한 말이 되어 있었다”고 고레에다는 말한다. 다른 한국 신문에 나온 한 문장은 문학적이고 근사한 표현이지만 자신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더구나, 한국 매체에 실린 인터뷰가 ‘시상식에서 일본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고 변질되는데 1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또, 그 며칠 뒤에는 ‘수상 연설에서도 일본은 난징대학살에 대해 중국에 사죄하라고 발언했다’는 식으로 변해 있었다. (20~21쪽)
가슴이 덜컹거리며 한숨이 나왔다. 내가 현장 기자로 뛰던 때의 일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30, 40분 가량의 인터뷰를 축약하는 과정에서 맥락을 들어내고, 쓰려는 방향(전문용어로 ‘야마’)에 맞춰 재가공한다. 인터뷰이가 길고 충실하게 설명한 것을 두세 문장으로 줄이면서 그가 얘기하려고 했던 취지나 배경은 날려버리고, 데스크나 자신이 정한 방향에 따라 맞춘다. 만일 인터뷰이가 “내 말은 그런 취지가 아니지 않느냐”고 항의한다면? “그게 그 얘기 아니냐”고 방어벽을 친다.
한국 언론의 기사 작성이 “그게 그 얘기 아니냐”는 식이 된 데는 나름의 알리바이가 있다. 뉴스를 신속하게 전달하려면 ‘역(逆)피라미드’ 방식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 ‘역피라미드’란 중요한 순서에 따라 팩트를 배치하는 것을 말하는데, 기사가 길면 뒷부분부터 잘라내면 된다. 이 역피라미드 스타일의 기사에서 맨 앞에 있는 리드(Lead)는 대체로 전체 상황을 한 줄에 압축해 구겨 넣는 것이다. 문제는 이 한 줄의 리드가 전체 상황을 ‘필연적으로’ 크든, 작든 왜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길게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 있고, 짧게 설명해도 되는 것이 있다. 그런데 몇 십 분의 인터뷰를 서너 문장으로 요약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맥락이 제거되면 인터뷰의 취지는 사라지는 것 아닐까. 오히려 정반대의 뜻으로 해석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해놓고 “그게 그 얘기 아니냐”고 하는 게 옳은 일일까.
보도가 나온 뒤 낭패한 얼굴로 “그 제목은 내가 말하려던 취지가 아니다”고 하소연하는 이들을 보곤 했다. 정작 그렇게 보도한 언론사나 기자에게는 말 한마디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요즘 정정보도나 반론보도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취재원들이 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변화의 조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기사를 쓸 때 조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밑바탕엔 단순한 ‘역피라미드 방식’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 언론이 이야기를 대하는 자세 자체에 문제가 있다. 다시 고레에다의 글로 돌아가보자. “나는 사람들이 ‘국가’나 ‘국익’이라는 ‘큰 이야기’로 회수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영화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큰 이야기’(오른쪽이든 왼쪽이든)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다양한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해왔다.”(25쪽)
큰 이야기/작은 이야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언론은 틀림없이 ‘큰 이야기’를 선호한다. 선호하는 차원을 넘어 애호한다. ‘작은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왜냐고? 큰 이야기는 쉽고, 작은 이야기는 어렵다.
큰 이야기는 취재하기도 용이하고, 독자들에게 전달하는데도 별 어려움이 없다. 이미 독자들의 머릿속에 대강 들어가 있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작은 이야기를 하려면 취재에 몇 배나 품이 들고,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도 쉽지 않다. 스토리텔링을 잘 해야 하고, 디테일을 흥미롭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원인은 기자들 쪽에만 있는 게 아니다. ‘작은 이야기’들을 전하려면 기자 수가 월등히 많아야 한다. 미국이나 일본의 주요 일간지 기자는 1000명이 넘는다. 한국의 주요 일간지 기자는 기껏해야 200, 300명 수준이다. 이 정도 숫자로는 그날 그날 터지는 사건사고, 정치일정 따라잡는데도 허덕인다. 작은 이야기에 몇 주 씩 달라붙을 여력이 없다. 안타깝게도, 취재력에 관한 한 드라마 작가가 기자들을 추월한지 이미 오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국 언론은 소품종 대량생산에 주력한다.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드는 다품종 소량생산은 어느덧 사치처럼 느껴진다. ‘큰 이야기’ 중심의 소품종 대량생산도 계속하다 보면 나름 이력이 붙고, 재미도 생긴다. 국가나 국익, 한국 경제, 한반도 위기, 사회 정의 같은 ‘큰 이야기’들을 잘만 굴리면 정치인과 기업인, 관료 같은 속칭 ‘힘 있는 자’들이 관심을 표시해온다. 그들 역시 ‘큰 이야기’들이 판치는 세상이 속 편하고 좋다.
언론은 ‘큰 이야기’로 제목 장사를 하면 할수록 영향력이 커진다. 또한, 워낙 큰 이야기들이 돌아가보니 세부적인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다. 똑같은 프레임에 맞춰 찍어내기만 하면 된다. 매순간 급박해 보이지만, 실제론 별로 다를 것도 없는 ‘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정작 중요한 ‘작은 이야기’들은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전진시킬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건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큰 이야기 중독자’였다. 사람들이 관심 있을 ‘큰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했고 찾아다녔고 세상에 말하려고 했다. 내가 했던 ‘큰 이야기’들이 더 의미 있는 ‘작은 이야기’들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니, 그 위험성을 또렷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렴풋이 알면서도 하루하루 바쁘다는 이유로 ‘작은 이야기’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작은 이야기’들을 심폐소생할 수 있었던 취재현장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뒤늦은 반성을 해본다.